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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개판은 전부 이슬람 혁명 때문인가?"

health001 2025. 7. 10.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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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호메이니의 이슬람주의 이념 때문에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며 국가 전략을 짜왔고 그 때문에 양국은 싸울 수밖에 없다 라는 말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사실 중간에 무언가 엄청나게 많이 빈 설명이다.


물론 호메이니가 "미국은 大사탄, 이스라엘은 小사탄"이라고 했고, 이를 근거로 포퓰리스트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가 반이스라엘 발언에 홀로코스트 부정론까지 온갖 어그로를 끌었으며 많은 이란 고위 인사들이 "시온주의 정권 압제로부터 팔레스타인 해방"을 운운하며 이스라엘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맞음.

하지만 그게 현재까지 이어져 오는 양국 간의 답도 안 나오는 적대 관계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의외로 이란-이라크 전쟁 때 호메이니한테 군사 지원까지 했던 역사가 있다! (한 놈이 있다는 건 받은 놈도 있다는 거니)

대미 관계도 마찬가지다. 역시 카터 행정부 당시 미국에 엄청난 굴욕을 안겨준 테헤란 미국 대사관 인질극과 이란 내 서방 소유 자원의 국유화 등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사건들이 혁명 직후 터져나왔으나 레이건 정부 당시 이란-콘트라 사건에서도 나오듯 호메이니는 미국과도 무기 거래를 했었다.

이란이 미국-이스라엘 사이는 시작부터 지금처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관계가 아니라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부터 여러 부침을 겪으면서 쭉 악화된 것이다. 이 말은 몇 가지 분기점과 행위자들의 선택, 그 속에서 우연적 사건의 전개 등이 거치면서 이렇게 '되어온' 역사라는 것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두 개를 꼽자면 역시 헤즈볼라와 이라크 전쟁이다.

헤즈볼라 문제를 이해하려면 이란 이슬람 혁명의 이념이 단순히 시아파 종교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는 것 이상의 사상임을 알 필요가 있다. 이슬람 혁명 이념은 1960-70년대에 냉전과 제3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이 격화되고 급진화되는 와중에, 소련 공산주의, 중국 마오주의, 아랍 사회주의, 심지어 이스라엘 시온주의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졌다. 시기적으로 구성하자면 북베트남 - PLO - 이란 - 헤즈볼라다. 당시 호치민, 레주언, 보응우옌지압 등 베트남 공산당이 남베트남에 게릴라를 통한 적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보며, 사회주의 조직인 PLO는 이스라엘에 인접한 요르단을 자신들의 '하노이'로 삼아 대이스라엘 투쟁을 펼치는 모방 전술을 채택했다. 이들이 요르단 왕정까지 투쟁 대상으로 삼으며 PLO의 기반이 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레바논 등지로 대거 추방되고, 이들은 레바논에서도 계속해서 북베트남식 혁명 투쟁을 지속한다. 그리고 이 다양한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이슬람 사회주의 계열 혁명군 캠프는 피가 끓는 중동 전역의 청년들을 끌어모았고, 여기서 훈련된 이들은 이란으로 돌아가 각종 반체제 정파의 지도부급 인물로 부상했다. 이념화된 군사조직 참여 경험은 혁명수비대의 창설 과정에도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 총리는 이집트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어 남부 국경을 안전하게 다진 뒤에, 팔레스타인 해방군 캠프가 산재한 북쪽 레바논을 향해 군사 행동을 개시한다. 1975년에 시작된 내전의 소용돌이로 레바논에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이스라엘은 1982년에 군대를 진입시켜 레바논 남부 지역을 완충지대로 삼았다. 이 레바논 내전은 레바논에 수니파 팔레스타인 인구가 대거 유입되며 마론파, 수니파, 시아파, 드루즈파 사이에 섬세하게 유지되던 균형이 깨지며 발생했다. 팔레스타인 수니파 난민들은 종파적 감정과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이라는 대의를 근거로 시아파 주민들도 억압했는데, 그래서 이들은 이스라엘군을 처음에는 해방자로 반겨줄 정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점령 정책 하에서 고난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시아파 정치 운동은 대이스라엘 투쟁을 개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번에는 이란의 혁명 이념을 수입해서 일어난 정당이 '신의 당', 헤즈볼라였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군과 이를 비호하는 미국 정부를 향한 자살폭탄테러를 전개하며 1980년대에 악명을 떨쳤다. 그리고 혁명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던 1970년대에 이미 이란의 정치 활동가들은 레바논의 시아파 정치 세력인 아말과 헤즈볼라의 창설부터 발전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주역들이었다. (60년대 국제주의와 70년대 사회혁명이 이란과 레바논을 연결하며 만들어낸 스토리는 그 자체로 대하 드라마지만 일단 여기서는 생략한다) 당연히 1980년대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와 이란의 콤, 마슈하드를 잇는 시아파 성직자 네트워크, 헤즈볼라와 혁명수비대를 잇는 무장조직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달리 말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헤즈볼라야말로 자신들의 혁명이 반제국주의의 대의를 호지하고 있으며 모든 '피억압자(mostazafin)'의 완전 해방을 추구하는 보편 운동임을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이란 혁명 당시 혁명의 주체를 '피억압자'로 상정하는 것은 당연히 냉전 시대 소련과 중국의 혁명 이념의 영향이 있었다. 더하여 이는 '폭정과 불의에 맞서는 것이 시아파의 진정한 정신'이라며 시아파를 근대적 혁명 이념으로 급진화한 알리 샤리아티가 행한 작업이기도 했다. 샤리아티는 파리에서 유학하며 마르티니크와 알제리가 만들어낸 탈식민의 사상적 비조 프란츠 파농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란이 이슬람 혁명의 보편성을 인정받기 위해 헤즈볼라를 지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사실 이란은 1990년대부터 이미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PIJ)나 하마스를 지원하면서 오슬로 협정을 수용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혁명 국가로서의 사명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유고 내전 당시 혁명수비대가 보스니아와 코소보를 지원하고자 파병되기도 했었다. (이때는 얄궂게도 세르비아에 맞섰다는 점에서 혁명수비대가 나토와 간접 협력 했던 셈이다) 따라서 단순히 '성지 예루살렘(= 쿠드스) 해방'이라는 종교적 감정을 넘어서 냉전과 탈식민 과정에서 등장한 20세기 마지막 사회혁명 체제의 속성이 이스라엘의 강박적 안보 태세와 타협점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게 종교든 혁명 이념이든 어차피 체제의 논리가 이스라엘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면 어쨌든 내생적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은 이렇게 서로 피를 보는 사이가 될 운명이었다는 게 아닌가? 여기서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세계체제 중심부가 정치적, 경제적 패권을 바탕으로 비서구에 행하던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좋게 말하면 시장통합이라고 하고 나쁘게 말하면 제국주의라고 한다) 이란의 경우 그 반작용은 주권 국가의 강화와 반자유주의적 근대성의 추구와 맞물린 동원 체제 수립, 국가 내 계급 관계의 대대적 변동을 낳은 사회 혁명의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1930년대 미국의 포디즘, 유럽의 파시즘-나치즘, 소련의 스탈린주의, 일본의 아시아주의-테크노파시즘 추구에 명백히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1950년대 '반둥 정신', 1960년대 쿠바와 베트남, 1970년대 세계 각지를 수놓은 '마지막 혁명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1970-80년대 한국의 운동권도 이 과정에서 탄생한 이들인데, 문제는 이들은 광역 정치보다는 국지 정치에 함몰되는 조선인들 특유의 정치 문화와, 외부의 혁명 사령부인 평양의 존재, 박정희의 위대한 탈식민적 업적, 미국 중심 세계체제에서 반주변부 지위를 획득한 남한 경제의 신화적 성장 등등 다양한 이유로 사회 혁명에 실패했고 국가 동원을 거부하며 다른 경로를 걸어갔다)

즉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반자유주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국가'다. 강압적 힘을 행사하는 관료 기구와 축적이 이루어지는 자본 모두 주권 국가로서 이란이 통제하는 국경 안의 영토를 근거로 한다. '국가 선포'를 하긴 했지만 사실상 영구 전쟁을 추구하는 ISIS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그 외에 국지적 차원에서 주권 국가와 관계 설정을 위해 쟁투하는 게릴라 세력과도 다르다. 국가급 행위자는 대체로 국제 질서에 안착하고자 하며 자신에 유리하게 대외 안보 및 경제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이익 추구 성향이 있다. (물론 ISIS와 여타 게릴라들도 그들만의 이익 논리가 따로 있고, 영역과 주민 통제라는 점에서는 유사성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익은 일반적으로 국가가 추구하는 이익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바로 이러한 이익 추구 동기가 작용하면, 제 아무리 대단한 혁명 이념도 달러 앞에서 한 수 접어주면서 "다 미래의 승리를 위해서야"라며 정당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혁명의 꿈을 뒤로 미뤄놓고 국제 무대에서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며 열심히 서방 자본가들과의 무역에 나선 소련, 혹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을 비난하며 세계 자본계급의 수괴 미국에 다가간 중공이 당장 대표적 예이다. 이란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1980년대에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무기를 지원받고 구매할 수 있던 것이다. 국익 내지는 특정 정치 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치할 때 거래가 발생했다.

그렇다면 그 일치된 이해관계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의 경우에는 이란-콘트라 사건이라는 이름에서도 알다시피 니카라과가 문제였다. 1979년은 현재까지 위대한 사회혁명이 발생한 인류사의 마지막 해였는데, 각각 니카라과 산다니스타 혁명과 이란 이슬람 혁명이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소 냉전 상황에서 니카라과의 산다니스타 사회주의자들을 진압하는 데 훨씬 더 큰 관심을 기울였기에, CIA를 통해 이란에 미국산 무기를 판매하고 그 대금으로 반공 게릴라 콘트라를 지원했다. 호메이니는 당장 사담 후세인이 쳐들어온 상황에서 이란군이 쓸 수 있는 모든 무기가 친미 팔레비 정권이 구비해놓은 미국산이라 어떻게든 미국산 무기를 구매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이스라엘과 이란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라는 공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거래를 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반 이스라엘 전선의 지도국들은 이집트와 시리아는 1970년대가 되었을 때 이미 눈에 띄게 약화된 상황이었다. 대신 석유파동을 통해 유입되는 막대한 자본으로 공격적 근대화에 매진하던 국가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라크와 이란이었다. 걸프 국가들은 이 시기까지는(혹은 지금까지도) 그러한 국가 강화와 사회 동원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중에서 바트당 이념으로 무장한 친소련 국가이자 전세계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명성을 드높이기를 원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스라엘이 보기에는 가시적으로 확실한 위협이었다. 반면 호메이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이라크의) 카르발라를 거친다"라며 공공연히 팔레스타인 해방을 선동했지만,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라는 새 정권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사담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하페즈 알 아사드가 이란을 지원했다. 얄궂게도 훗날 이스라엘은 이란의 숙적이, 아사드 가문은 이란의 맹방이 된다. 아사드의 시리아도 세속주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샤리아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하마와 홈스 등지에서 수만명 단위로 살해한 잔혹한 정권이었다는 점에서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는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상극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제국주의와 반이스라엘이라는 이념, 결정적으로 이라크 견제라는 국익이 맞물리며 두 정권은 2024년 아사드가 몰락하기까지 40년 넘는 우정을 쌓았다.

어쨌든 바로 이것이 내가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던 두 번째 요인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는 지금은 너무나 옛날 이름이 되어서 그 중요성을 사람들이 망각하곤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과 걸프 전쟁까지 중동에서 사담 후세인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심지어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 시아파 혁명 이념의 확산을 경계하며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이라크가 쿠웨이트라는 동료 걸프 왕정 국가를 합병하려하며 걸프전을 일으키자 반대로 이란과 제휴 관계를 맺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200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동 중심에는 시리아, 이라크, 이란이라는, 서로 다른 지향성을 지닌 반제국주의 성향의 혹독한 권위주의 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다소 주변인 마그레브에는 카다피의 리비아도 있었고). 그리고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오만, 터키라는, 역시 서로 다른 지향성을 지닌 친미 정부들과 매우 복잡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9.11 테러가 일어나기 직전인 2000년 즈음을 돌이켜보면, 중동에서는 이스라엘도, 이라크도, 이란도, 사우디도 모두 이러한 아슬아슬한 세력균형 위에서 평화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3년에 부시 정권에 의하여 번개처럼 후세인 정권이 무너졌고, 이라크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란은 2001년 9.11 테러 당시 알카에다를 규탄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현지 지식을 바탕으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진공과 탈레반 정벌 작전을 지원했다. 1997년에 신임 대통령에 오른 하타미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논제를 반박하며 "문명 간 대화"를 주창하고 자유시장경제를 확대하며 이란판 신자유주의를 제한적이나마 추진했다(물론 난 헌팅턴이 맞다고 생각함. 문명의 충돌만큼 오독이 많이 된 텍스트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봄). 이것은 혁명 국가로서 정체성은 최소한으로 지키되, 소련이 멸망하며 혁명의 시대가 저문 이후, 즉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2002년 부시의 연두교서에 등장한 '악의 축' 연설이었고, 2003년에 사담 후세인을 순식간에 박살낸 충격과 공포였다. (물론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헤즈볼라도 모자라서 PIJ와 하마스 등 오슬로 협정을 거부하는 세력만 골라서 지원하는 이란은 저 혁명 국가로서의 본성을 반드시 드러낸다고 생각했으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만..) 이란이 8년 간 총력전을 했음에도 밀어내지 못한 이라크를 걸프 전쟁에 이어 이라크 전쟁까지 두 번이나 어린애 팔 비틀듯이 무너뜨렸으니 이란이 느낀 공포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사실 하타미 시기 이란이 팍스 아메리카나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나 네오콘과 '아다리'가 안 맞아서 내부에 혁명수비대를 비롯한 강경파가 득세하게 된 스토리는 알 사람은 다 아는 것이긴 하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그리고 사우디와의 문제에서 진짜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팔레비와 호메이니 가릴 것 없이 이란 세력을 막아주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냥 무너진 것도 아니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미국이 이라크에 '선물'해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위대하고 도덕적이고 아름답고 하여간 없으면 인간이 살 수가 없고 뭐 마약보다도 더 좋다는 자.유.민.주.주.의.와 다.수.결.투.표. 원칙에 근거해서 정권을 잡으며 국가 성격 자체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후세인은 수니파 세력을 기반으로 삼긴 했지만 그건 사실 고향 사람들 가져다 쓰느라 그렇게 된 면이 크고, 실제로는 이라크 민족주의, 아랍사회주의, 세속주의 이념을 더 많이 강조했다. 그런데 여기에 이란이 1960년대부터 푹 숙성시킨 시아파 혁명 이념이 유입된 것이다. 레바논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란에는 이미 사담 후세인의 억압을 피해 이란에 망명한 시아파 성직자와 정치 활동가들이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다와당을 비롯한 이라크 출신의 시아파 정치 조직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에 이란 편에 서서 조국 이라크와 싸우며 혁명에 대한 충성을 보이기도 했다. 거기에 이라크에는 나자프와 카르발라라는, 전세계 시아파 최고의 성지들이 있는데 여기가 이란의 양대 성지인 콤과 마슈하드와 연결되면서 이라크 정치의 시아화는 급속도로 가속화된다. 그리고 50대가 넘어서 국가를 접수한 남조선 운동권과 달리 이미 20대와 30대에 혁명을 성공시켰던 이란의 운동권들은 국가를 운영하고 총력전을 수행하고 국제주의 혁명을 이끈 '프로'들이었다. 이들이 이란 혁명과 레바논 헤즈볼라 경험을 이라크에 적용시키며 미제국주의 점령군을 향한 가열찬 투쟁을 개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이무렵은 20대 초반의 어린 JD 밴스가 이라크에 파병된 바로 그 시점이기도 했다. 부통령 각하의 주둔지가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청년 각하 옆에서 폭탄을 터트린 게 전설적 장군 카셈 솔레이마니의 지휘를 받는 이라크의 카타이브 헤즈볼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1. 체제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헤즈볼라 문제로 이스라엘과 타협할 공간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2. 헤즈볼라를 통해 이미 잘 훈련한 혁명 수출의 기술이, 이라크라는 혁명의 비옥한 토양이 결합하자 이란은 마침내 이라크라는 가장 중요한 발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담 후세인이 사라진 시점에서, 아사드의 시리아는 여전히 이란의 우방국이었음을 고려하면 2003년 이후 중동 중심부(마슈레크)에서는 이란의 활동을 막을 존재가 사실상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여기에 2011년 아랍의 봄이 터지면서 아랍의 취약한 국가들이 연쇄 붕괴하고, 이란이 지휘하는 '저항의 축'이 꿈틀대기 시작하니 이스라엘과 사우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이란의 존재 자체에 실존적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헤즈볼라까지는 그렇다 쳐도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존속했다면 이란이 이렇게까지 성공적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미국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했던 온건유화파들과 외교관들이 혁명수비대 장군들보다 더 힘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후세인이 아랍의 봄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적어도 시리아와 이라크가 동시 붕괴하여 ISIS가 나타나는 참사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스라엘은 시리아, 이라크, 이란 사이를 뒤에서 오가며 사우디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정교한 외교-첩보 게임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의 몰락은 혁명 국가 이란에 혁명 수출의 놀라운 기회와 함께 미군 침공이라는 편집증을 안겨주었고, 중동의 세력 균형 전체를 이란에 쏠리게 만들었다. 이후 중동의 모든 비극이 사담의 몰락에서 연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역 질서의 붕괴에 따른 내전과 군사 개입, 지정학 경쟁, 강대국 충돌까지 21세기 중동이라는 소용돌이의 중핵에 있는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라크 붕괴가 시리아 붕괴로 이어져 유럽 난민 위기로 번지며 자유주의 지상락원 유럽 체제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는데, 이란의 붕괴라.... 장담컨대 아마 그날이 유라시아 서반부에서 자유주의가 종말하는 날일 것이다.

아 이 말 하려고 이 글 쓴 건 아닌데 하여간 요지는 어떤 특정 사건이나 이념만으로 국가급 사건과 전략들이 사전결정되진 않으니, 그 중간과정을 찾고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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